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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 King Cole(냇 킹 콜)
fsg
2013. 5. 29. 08:06
http://blog.naver.com/dawonhea/30128483487
Nat King Cole(냇 킹 콜)
기본 정보
본명 : 너새니얼 애덤스 콜(Nathaniel Adams Coles)
출생 : 1919년 3월 17일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사망 : 1965년 2월 15일(45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
장르 : 재즈, 스탠더드 팝, 리듬 앤 블루스
데뷔 : 1939년 ‘킹 콜 트리오’재즈 그룹으로 데뷔
수상경력
1950년 아카데미 어워스 최우수 주제가상
1990년 그래미 평생공로상
발표 앨범
Ballad Of The Day('56 #16), Love Is The Thing('57년 8주간 No.1), This Is Nat King Cole('57)
Just one Of Those Things('57 #18), St. Louis Blues('58 #18), Cole Espanol('58 #12)
Ramblin' Rose('62 #3), Love('65 #4), Love('64 #18), My Fair Lady('64), Unforgettable('65 #30), Great Songs('66), Close Up('69)
대표곡
"It's only a Paper Moon" (1943), "Route 66"와 "The Christmas Song"(1946), "Nature Boy"(1948), "Mona Lisa"(1950), "Unforgettable"(1951), "Ramblin' Rose"(1962), 그리고 "Those Lazy-Hazy-Crazy Days of Summer"(1963) 등이 있다.
Nat King Cole(냇 킹 콜) - Too Young [가사해석]
They try to tell us we're too young
Too young to really be in love
They say that love's a word
A word we've only heard
But can't begin to know the meaning of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어리다고 말하려 하죠
진짜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요
사람들은 사랑이 하나의 단어라 해요
우리가 들어보긴 했지만 그 뜻을 알기엔
아직도 멀었다는 그런 단어라는 거예요
And yet we're not too young to know
This love will last though years may go
And then some day they may recall
We were not too young at all
하지만 우리가 그걸 모를 만큼 어리진 않아요
세월이 흘러도 이 사랑 변함없을 거예요
언젠가 사람들은 다시 생각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조금도 어리지 않았다고요
And yet we're not too young to know
This love will last though years may go
And then some day they may recall
We were not too young at all
하지만 우리가 그걸 모를 만큼 어리진 않아요
세월이 흘러도 이 사랑 변함없을 거예요
언젠가 사람들은 다시 생각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조금도 어리지 않았다고요
Nat King Cole(냇 킹 콜) [뮤지션 소개]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Nat King Cole)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세련된 도회적 정서와 따뜻한 인간미, 흑인 특유의 애수감, 독특한 재즈 필링이 그의 매력이었다. 그는 워낙 부드럽고 멋진 목소리를 지닌 덕에 수많은 발라드 곡을 불러 히트시켰고, 스윙 시대를 거친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감각을 바탕으로 스윙 곡들 역시 히트시켰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은 당시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드럽고 달콤한 현악기 연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팝 차트를 석권했던 최초의 흑인으로 나라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줬던 잊을 수 없는 '블랙 오르페우스(Black Orpheus)'이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본명은 너새니얼 애덤스 콜(Nathaniel Adams Coles)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재즈 가수겸 피아니스트였다. 1919년 3월 17일생으로 미국의 앨라배마(Alabama)주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성 페트릭 데이(St. Patrick's Day)에 태어났다. 4살 때 시카고로 이주하였으며,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재미삼아 오르간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는 놀랄 정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음악에 대한 타고난 재능을 지녔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은 피아노 연주를 하며 음악을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침례교 목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12세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식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당시 그가 주로 배웠던 음악은 클래식이었지만 클래식 외에도 재즈와 가스펠 음악 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가며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되고, 교회에서 오르간 주자와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며 뮤지션으로의 꿈을 키웠다.
가수로서만 알려진 냇 킹 콜(Nat King Cole)은 실제 재즈 피아니스트로 더 인정 받았던 뮤지션이다. 세 형제 에디 콜(Eddie Cole), 프레디 콜(Freddy Cole), 아이크 콜(Ike Cole)도 모두 재즈 뮤지션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음악 활동을 했다. 재즈 피아노에 심취해 있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음악반 수업을 받았으며 아마추어 밴드 로얄 튜크스(Royal Dukes)를 결성하여 리더로 활동했다.10대 후반 학교도 그만두고 베이시스트였던 친형 에디 콜(Eddie Cole)과 함께 거리의 음악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으며, 에디 콜(Eddie Cole)이 결성한 밴드인 '콜스 밴드(Cole's Band)'에 가입하여 본명 대신 '냇 콜(Nat Cole)'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피아니스트로써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36년 콜스 밴드(Cole's Band)의 이름으로 그의 첫 레코딩인 [Eddie Cole's Solid Swingers]를 녹음한뒤 꿈을 찾아 LA로 떠나게 된다.
1937년 1월 무용수였던 '나딘 로빈슨(Nadine Robinson)'과 결혼했다.
1939년 LA로 이주한 그는 냇 킹 콜 트리오(Nat King Cole Trio)를 결성했고, 이 트리오는 드럼이 제외된 기타,베이스,피아노의 양식을 정립한 것으로 당시에 볼 수 있었던 라인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적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되었다. 오스카 무어(Oscar Moore, 기타),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s, 베이스)가 함께한 이 트리오는 밴드 앙상블에 있어서 멜로디를 보다 선명하게 유지하고 가벼운 스윙감과 함께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 트리오는 주당 90달러를 받으며 재즈 클럽들에서 연주 위주의 공연 활동을 매일 밤 펼치며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이들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인기를 얻어 갔고 그에 따라 팬들은 냇 킹 콜(Nat King Cole)에게 노래를 요청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 당시 할리우드의 재력가로 할리우드에서 스와니 인이라는 클럽을 경영하던 밥 루이스(Bob Louise)가 자기의 클럽에 출연시킬 그룹을 찾던 중 냇 킹 콜(Nat King Cole)을 발견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밥 루이스(Bob Louise)는 영화계의 거물들이 단골로 찾아오는 자기의 클럽에 뛰어난 싱어를 세우길 원했고, 냇 킹 콜(Nat King Cole)의 고급스런 허스키 보이스에 매력을 느껴 그를 전격적으로 스카우트하기에 이르렀다. 봅 루이스(Bob Louise)는 냇 킹 콜(Nat King Cole)을 다른 가수 두 명과 함께 묶어 냇 콜 스윙스터스(Nat Cole Swingsters)라는 트리오를 구성해 클럽 무대에 세웠다.
냇 콜 스윙스터스(Nat Cole Swingsters)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은 냇 킹 콜(Nat King Cole)은 그때부터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 무렵 처음으로 'Straighten Up And Fly Right' 같은 자작곡을 직접 부르기도 했는데 손님들의 반응이 예상 외로 좋았다. 특히 스와니 인의 손님들 중에는 레코드 산업 관계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에게 자연히 계약 조건을 제시하며 접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은 손님들의 요청에 의해 어느 날 'Sweet Lorraine'을 불렀는데 이 노래가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Sweet Lorraine'의 밤 이후 냇 킹 콜(Nat King Cole)은 피아노 연주와 노래를 병행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재즈 연주 트리오로 활동하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은 데카 레코드(Decca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한 뒤 노래하는 피아니스트로 약간의 변신을 시도한다. 첫번째 히트곡 '스위트 로레인(Sweet Lorraine)'을 발표하고, 밥 루이스(Bob Louise)를 만나며 대중적인 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Sweet Lorraine' , 'Honeysuckle Rose' , 'Hit That Jive Jack' 이 3곡은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대형가수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1943년 데카 레코드(Decca Records)를 떠나 캐피털 음반사(Capitol Records)로 이적한 그의 트리오는 'The King Cole Trio'라는 이름으로 계약하고 음반 데뷔를 준비하게 된다.
1944년에 데뷔 음반 'The King Cole Trio'를 발표한 킹 콜 트리오(The King Cole Trio)는 같은 해에 첫번째 히트 곡 'Straighten Up and Fly Right'를 발표하였다. "Straighten Up and Fly Right"은 그를 가수로서 명예를 얻도록 한 음악이었다. 이곡은 차트에서 10주간, 포크 차트 6주간 톱 을 차지한 곡으로 나른하면서도 선명한 멜로디를 풀어내는 피아노와 기타 연주로 시작, 더없이 정겨운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보컬과 코러스의 절묘한 하모니가 킹 콜 트리오(The King Cole Trio)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곡이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피아노의 거장 빌 에반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1946년 그의 3중주 밴드 킹 콜 트리오(The King Cole Trio)는 그 라디오 쇼에서 나오는 첫 흑인 음악 그룹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또 하나의 히트곡 'The Christmas Song'은 재즈계의 전설적인 가수 멜 토메(Mel Torme)와 작곡가 밥 웰스(Bob Wells)가 지난 1944년 만든 노래로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성탄 노래로 자리 잡았으며 2006년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제치고 가장 많이 팔린 성탄 노래로 뽑히기도 했다. 토메(Mel Torme)는 로스앤젤레스 외곽 톨루카 레이크에 있는 밥 웰스(Bob Wells)의 집을 방문했다. 7월의 찌는듯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던 웰스는 "시원한 것을 생각하려 애쓰고 있다. 샤워와 수영도 해보고 다 시도해봤다"고 호소했고, 이에 토메는 "그럼 이걸로 노래를 만들어보자"며 그와 함께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The Christmas Song'을 작곡했다.
이 노래는 1946년 가수 냇 킹 콜에 의해 최초로 발표됐으며 후에 토메와 엘라 핏제럴드, 레이 찰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비롯해 100명이 넘는 음악가들에 의해 리메이크 됐다. 가수였던 토메가 본인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먼 훗날에야 취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35년간 토메의 대변인으로 일했던 원로 음악매니저 데일 쉬츠는 "멜과 토메는 노래를 만든 직후 냇 킹 콜에게 가져가 들려줬고 콜은 그 자리에서 '이건 내 노래'라고 못박았다"며 이에 얽힌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1948년 또 다른 대형 히트 곡인'Nature Boy' 가 크게 히트하며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팝 발라드 곡인 'Nature Boy'는 이후 많은 가수에 의해 다시 불려지며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냇 킹 콜은 나딘 로빈슨(Nadine Robinson)과 이혼을 하고, 이혼후 6일만에 무명 가수였던 마리아 호킨스 엘링턴(Maria Hawkins Ellington)과 할렘의 아비시니아 침례 교회(Abyssinian Baptist Church)에서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1949년 뉴스 위크지는 ‘가장 성공한 흑인 피아니스트이며 최고의 흑인 아티스트’로 냇 킹 콜을 선정했다. 1940년대 냇 킹 콜이 히트시킨 대부분의 곡들이 킹 콜 트리오(Nat King Cole Trio)의 반주로 녹음되었는데 그 어느 곡에서나 활발한 느낌의 간주(Interlude)와 솔로를 위한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오스카 피터슨의 트리오가 바로 이 편성을 계승한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냇 콜 스윙스터스(Nat Cole Swingsters)의 멤버는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s)가 빠지고 조니 밀러(Johnny Miller)로 교체 되고, 다시 찰리 해리스(Charlie Harris)로 교체 된다.
1950년 전미 차트 1위에 8주간 오르는 대성공을 거둔 'Mona Lisa' 는 그를 완전한 스탠다드 싱어로 변화시키는 결정타 역할을 했으며, 그는 이해에 아카데미 최우수 주제가상을 수상하였다. 'Mona Lisa'는 첫해에 300만장이라는 대기록을 이뤘고, 이후 오늘날까지 그의 앨범은 매년 100만장씩 팔려나갈 정도로 스태디 셀러로서 꾸준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후 그는 음악적으로 깊어지기보다는 쉽고 친근한 음악으로 대중의 곁에 자리하며 흑인의 애환을 달래주는 참여적 성향의 뮤지션으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흑인들의 곁에 다가가 인종 차별 철폐를 외치고, 멸시받는 흑인들을 위한 공연을 펼치는 등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흑인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했고, 그런 그의 성향때문에 인종 차별 주의자들에게 집단 폭행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이해에는 그의 딸 나탈리 콜(Natalie Cole)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1951년 킹 콜 트리오(The King Cole Trio)를 해산하고 그 후는 가수생활에 전념하였다. 이해에 발표한 '투영(Too Young)'은 가장 크게 히트한 곡이다. 차트12위에 올랐던 'Unforgettable'는 어빙 고든이 작사·작곡한 안타가운 모정(慕情)의 발라드로, 결코 화려한 노래는 아니지만, 마음에 스며드는 듯한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냇 킹 콜의 레코드로 히트했고, 그 후 1959년 가을에 다이나 워싱턴이 리바이벌 히트시켰다. 훗날 딸이 리메이크 하면서 부녀 모두에게 영광을 선사하게 된다.
1955년에는 당대 인기 쇼 프로였던 CBS의 애드 설리번 쇼에 첫 출연하여 1961년까지 6번이나 출연했다.
1956년 냇 킹 콜은 첫 솔로 앨범 [Ballad Of The Day] 발표하여 빌보드 앨범차트 16위 기록했으며,11월 6일 부터 NBC-TV에서 흑인으로써는 최초로 자신의 쇼를 진행하며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When I Fall In Love' 라는 곡은 같은해 냇 킹 콜이 출연했던 영화, 이스탄불’에서 흘러나왔던 재즈의 고전중 하나이다. 또한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주연을 했던 1993년도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도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어 뒤늦게 히트를 하기도 했다. 이해 4월 9일 앨라배마에서 인종 차별주의자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흑인에게 공연을 허락한 조치에 분개한 백인 폭도들이 콜을 무대에서 끌어내 어디론가 납치하려는 습격을 저질렀으며 냇킹콜은 피를 흘리면서도 노래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해에 캐피톨 레코드의 세계 최초의 원형형태의 사옥이 완성 되는데 캐피톨 레코드에서 냇 킹 콜의 대 히트는 자금줄 역할을 해주었고, 이에 고무된 캐피톨 레코드는 벌어들인 수익으로 사옥을 지었다. 그래서 이 사옥을 Nat(냇 킹 콜)이 지은 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7년 2집 앨범 [Love Is The Thing] 발표했고, 빌보드 앨범 차트 8주간 정상을 차지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8년 영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에서 작곡가 W. C. 핸디의 역을 맡았고, 첫 스페인어 라틴 앨범 [Cole Espanol]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2000년에 만들어진 멜로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왕가위 감독) 속에 흐르던 노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as, Quizas, Quizas)'가 영화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콜의 음반을 발매한 Capitol사는 그의 첫 번째 스페인어 라틴 앨범<Cole Espanol>을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로 꼽을 정도였으니 이 음반의 폭발적인 인기를 가늠 할수 있었다.
1959년 두번째 스페인어 라틴 앨범 <A Mis Amigos>를 발표했다.
1960년: 빌보드지는 ‘1940년~1960년대까지 20년간 최고의 음반판매 실적을 기록한 아티스트’로 특집기사 게재하기도 했다.
1962년 멕시코에서 마무리를 지은 <More Cole Espanol>는 세번째이자 그의 마지막 스페인어 라틴 앨범이었다.
1963년 빌보드 차트 6위까지 올랐던 경쾌한 스윙풍의 곡‘Those Lazy Hazy Crazy Days of Summer’이 발표 되었다.
1964년 그의 최고 히트작중 하나인 'L-O-V-E'는 미국 차트에 8주간이나 1위에 오르는 대 성공과 함께 영어를 포함한 6개 국어 버전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평소 흡연이 자신의 낮은 목소리를 유지시킨다는 믿음으로 평소에 하루 네갑의 담배를 즐겼던 그는 그해 12월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1965년 2월 15일 가수로서 꾸준한 인기를 누리던 그는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Santa Monica)의 세인트 존스 병원(St. John's Hospital)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동원, 1965년 1월 25일에 폐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과 명성에 비해서 너무 일찍 사람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지 꼭 70일만인 1965년 2월 15일 마흔 다섯 살이란 아까운 나이에 병원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엔터데이먼트 위클리지는 ‘미국을 대표했던 스타가 사라졌다’란 제목으로 8페이지 분량의 특집기사 다루기도 했다.
1991년 빅히트한 'Unforgettable With Love'는 냇 킹 콜의 딸 나탈리 콜이 아버지에게 헌정한 앨범이다. 1975년에 데뷔하여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에서 노래를 불러 얼굴을 알리기도 한 나탈리 콜(Natalie Cole)이 최신 장비를 이용하여 아버지의 생전에 녹음했던 'Unforgettable'를 아버지가 부르는 모습과 목소리를 겹쳐서 더빙(Overdubbing)하는 첨단기법으로 제작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곡은 그녀가 열다섯살일 때 48세 한창나이로 폐암이 앗아가 버린 아버지를 그리는 애절한 사랑을 담아 큰 감동을 주었다. 'Unforgettable With Love'는 91년에만 4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외에도 몇곡의 곡을 듀엣곡으로 만들어 히트시켰다.
1992년 그녀는 'Unforgettable'로 34회 그래미 상(Grammy Award)에서 올해의 레코드상,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등 본상 3개 부분을 비롯하여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또한 이 곡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냇 킹 콜은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나탈리 콜(Natalie Cole)이 가수가 되었다. 1975년에 데뷔한 나탈리 콜은 아버지 냇 킹 콜처럼 재즈, R&B, 소울, 팝,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꾸준한 인기를 얻었으며, 그레미 상도 8번이나 수상했다. Nat King Cole(냇 킹 콜)의 친동생 Freddy Cole(프레디 콜) 또한 현재도 스윙감 넘치는 보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990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에는 그의 모습을 한 우표가 발행되었고, 1997년에는 다운 비트 재즈 명예의 전당(Down Beat Jazz Hall)에 등록 되었다. 2000년에는 초기 로큰롤에 큰 영향을 미친 공로의 하나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에 등록되었으며, 2007년에는 히트 퍼레이드 명예의 전당(Hit Parade Hall)에 등록 되었다. 2차례나 내한 공연을 하며 우리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던 Nat King Cole은 캐피톨 레코드에서 정규 앨범 30장과 컴필레이션 앨범 10장을 발매했으며, 지금까지 5000만장 이상의 매상을 자랑하는 미국이 낳은 흑인 보컬리스트 넘버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