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진정한 주인
최초로 문자를 만든 것은 동이족
▶ 한자의 원조인 갑골문은 중국이 아닌 동이족의 문자이다
일반적으로 한문은 중국인이 만든 중국의 문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의 원조는 은나라의 갑골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주나라 때부터야 비로소 중국 고대사의 확실한 연대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즉 주나라 이전시대는 자기네 나라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갑골문자의 발굴로 중원 땅에 실존했던 국가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게 될 때까지, 주왕조 이전의 나라인 은나라는 기록과 물증이 없어 전설 속의 왕조로 알려져 왔었습니다.
저 유명한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은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이고 주나라는 한족(漢族) 국가라고,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라고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은왕조는 동이족이 통치하였던 국가였으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입니다.
은나라의 건국시조도, 나라 자체도 동이족의 국가인데 거기서 나온 문자만 동이족이 아닌 한족(漢族)의 문자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 한문과 한글은 우리 민족의 완벽한 문자 시스템
한문의 근원인 녹도문 또는 갑골문자도 우리조상이 만들었고 거기서 나온 한문 또한 동이족의 문자였습니다. 후대에 한문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중국인들이 문자의 시조라 여기는 창힐 역시 자부선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동이족이었습니다.
만물을 형상화한 한문은 신시배달시대의 녹도문자가 뿌리가 되어 탄생한 음(陰)의 문자이며 뜻글자이고, 후대인 단군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림토문자에서 만들어진 한글은 양(陽)의 문자이며 소리글자입니다.
즉, 뜻글자이자 음(陰)문자인 한문과 소리글자이면서 양(陽)문자인 한글을 함께 써야 완벽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집니다. 이 두 문자를 함께 써야만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말할 수 있고, 그 뜻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문자를 최초로 발명한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게 완벽한 문자를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 한자는 과거 없었던 글자를 중국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배달국시대의 녹도문 이래 동이족들이 세운 은나라에서 쓰던 글자들이 계속 발전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역사에는 한문을 언제 수입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군시대 이후 동이족이 힘이 없어지고, 진나라, 한나라 등 한 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한문(桓文)은 한문(漢文)으로 바뀌어졌으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며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와 그 문자인 갑골문도 중국의 나라와 문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한문은 중국의 고리타분한 글자요 한자를 쓰는 것은 사대주의라는 비판 속에서, 진짜 기원도 모르면서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한글과 한자를 병용해온 것은 두 가지 문자의 발명국 후손으로써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입니다.
<참고자료>
'한자는 우리 글이다'[2001년 7월 2일자 경향신문 기사]
음성언어로서 한국어와 중국어, 문자언어로서 한자와 우리 글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연구서 2권이 출간되었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서로 다른 어족에 속한다거나 한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다는 기존 학계의 정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경희대 강사인 김지형 박사(국문학)는 '한자 전래 이전 시기의 한국어와 중국어와의 비교'(박이정)란 책에서 서로 다른 어족에 속했다고 알려진 한국어와 중국어 사시에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볼 때 두 말이 한 뿌리로부터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한국어는 몽골, 만주 터키와 같은 알타이어족, 중국은 한장(漢藏)어족에 속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김박사는 "상고시대 이전에 6개의 언어 집단이 한국어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 중 일부가 중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한자어 213자의 상고시대 발음을 재구(이론을 바탕으로 추정하는 것)해 한국어 300여 개 단어와 비교했다. 예를 들어 '人(인)'자의 중국 상고시대 발음은 '니인'(njin)으로 우리말 '놈''님''남'과 같은 어두자음인 'n' 음가를 갖는다. 또 '河'(하)의 상고시대 재구형 '가르'(gar)도 '강'(江)의 옛말인 '가람'과 비슷하다.
김박사는 "한국어와 중국어의 어족을 가르는 차이는 어순과 성조(높낮이)인데 이는 한자가 전래된 상고시대(BC 1세기) 이후의 일이여 음성언어 단계에서는 같은 말로 볼 만한 발음상의 공통점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한편 재야 사학자 박문기씨는 음성학정, 문화학적 근거를 들어 한자가 중국 글이 아니라 우리 글이라고 주장한 '한자는 우리 글이다' (양문)를 펴냈다. 학계에서도 유창균 계명대 석좌교수(국문학)가 1999년 '문자에 숨겨진 민족의 연원'이란 저서에서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박씨는 한자가 우리 글이란 근거로 한자에 깃든 문화와 관습이 중국보다 우리와 가깝다는 점을 든다. 예컨대 '家'(가)는 집을 뜻하는 면(갓머리)자와 돼지 시(豕)자가 합쳐져 '집안에 돼지가 있다'는 뜻인데 중국에서는 돼지를 집안에서 키우는 풍습이 전혀 없다. 반면 우리는 전라도, 제주도에 이 풍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글자의 소리를 보더라도 한자가 우리말에 가깝다는 게 박씨의 주장이다. 날숨과 들숨을 뜻하는 호흡(呼吸)의 경우 우리말로는 소리가 분명히 나가고 들어가지만 중국발음 '후시'는 모두 새는 소리가 되고 만다. 출입(出入)도 중국 발음은 '츄루'로 본뜻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김지형, 박문기씨의 주장은 지금까지 중국문자인 한자를 우리가 빌려 썼다는 일방적인 차용의 관점을 탈피해 두 문화 사이의 영향 관계를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 |||
2007년 02월 16일 |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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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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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遼寧)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吉林)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史)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黑龍江)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內蒙古)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金淸)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大脈)·근맥(根脈)”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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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 벼농사와 고인돌 클릭참조>> <<개의 조상은 동아시아 늑대 클릭참조>>
#상(은)나라, 배달겨레 발해문명들의 후예
사기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학계와 정부는 ‘하상주 단대(斷代) 공정’에 따라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했다.
즉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에 의해 멸망했다. 은이라는 나라 명은 상왕조의 마지막 도읍 명칭인데, 주나라 사람들이 은으로 낮춰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상나라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갑골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양의 예제를 확립했다.
한자의 뿌리인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의 뒤를 이어 갑골문자가 만들어졌다.
천하를 통일한 동이
상나라 시조인 설(契)은 요순 시절에 우(禹)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商)이라는 곳에 봉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설로부터 3대)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그리고 왕해(王亥·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는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왕해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그 족속의 재물을 빼앗았다. 세력을 넓혀간 상은 훗날 성탕이라는 영웅을 만난다. 탕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인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왕조는 걸 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기에 접어든다. 천하의 인심을 얻은 성탕은 도읍을 ‘박(毫)’으로 옮긴 뒤 드디어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BC 1600년이다.
그 뒤에도 역마살이 끼였는지 하왕조 멸망 뒤에도 다섯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반경(盤庚)이 BC 1300년 은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했다.(웨난의 ‘하상주 단대공정’(일빛) 참조) 상은 은 천도 이후에도 12명의 왕이 254년 동안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다가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주왕은 나중엔 폭군이 되고 여성의 치맛폭에 싸여 천하를 그르쳤지만 “처음엔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사기 은본기)”였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자꾸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양념으로 인용해보자.
“665년, (의자)왕은 궁녀와 함께 주색에 빠지고 즐기기만 했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간언하자 화가 난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인지, 아니면 ‘승자의 전리품’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되풀이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발해문명의 후계자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배달겨레 발해문명의 후계자였던 상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도성은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그런데 상나라는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상나라 도성이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먼저 성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 허난성(河南省) 옌스(언사·偃師)상성의 궁전터는 그 규모가 19㎢에 달했다. 성탕은 하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 정저우(정주·鄭州)에 도읍했는데(중정·仲丁 시기에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25㎢였다.
정저우 상성의 경우 궁전 내부에서는 100기 정도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인다. 외성에서는 중·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됐다. 이 무덤에서는 력(격·솥의 일종), 작(爵·술잔), 분(盆·물과 술 담는 동이), 규( ·제사에 쓰이는 세발달린 가마솥), 언( ·시루), 존(尊·술그릇)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노예제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또한 인쉬(은허·殷墟)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다.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왕이룽(왕의영·王毅榮·국자감 좨주)은 의사에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약재에 뭔가 전서(箋書)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석학자인 그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것은 훗날 갑골문으로 확인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갑골이 허난성 안양센(安陽縣)의 샤오둔춘(小屯村)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학계는 1928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15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2만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의 원형, 즉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쉬는 BC 1300년부터 BC 1046년 주왕이 분신자살할 때까지 상나라의 도읍지였으며, 254년간 이른바 은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의 한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있는 바로 그 인쉬…. 이곳에서는 갑골문자뿐 아니라 궁전터와 종묘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떼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이른바 인쉬에서는 100㎏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와 옥기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성과가 중국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상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갑골문이 해독되면서 상나라의 역사가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 갑골에 새겨진 문자(갑골문자)는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수수께끼의 열쇠
“이로써 상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 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신권과 왕권의 복합왕국이었다는 것까지….”(이형구 교수)
짐승문양, 도철(괴수)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예기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가 자랑인 다양한 생활용기도 상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상나라 문화와 동이족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이미 상나라가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BC 5000년)-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샤자뎬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고조선의 문화로 여겨짐)의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BC 1600년 무렵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상나라라고….
상나라와 한민족(上)
ㆍ상나라 귀족묘 출토 인골…한족 아닌 백의민족 모습
“(시조인) 설 현왕이 아들 소명(설로부터 2대)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순자·성상편)
중국 문헌은 동이족인 상족(商族)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할 때까지의 역사와 활동무대, 즉 시조 설부터 성탕의 상나라 건국(BC1600년)까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놓았다. 중국 학계는 이 문헌기록을 토대로 다각적인 분석에 들어간다.
안양 인쉬에서 발굴한 상(은)나라 무덤. 노예로 추정되는 대량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 순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여의 습속과 같다. |
옌산에서 백두산·헤이룽강까지
처음에 인용한 ‘순자 성상(荀子 成相)’편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요(遼·랴오허를 뜻함)는 지석에서 나온다”는 내용이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편에 나온다. 이 내용을 주석한 가오유(高誘)는 “지석은 산의 이름이며 변방의 바깥에 있고, 요수(遼水·랴오허)가 그곳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즉 시조 설은 랴오허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赤峰)시 커스커텅치(克什克藤旗) 부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쪽바다’는 발해이다.
또한 ‘여씨춘추 유시(有始)’편에는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진징팡(김경방·金景芳)은 이 모든 문헌을 근거로 “설, 즉 현왕은 북방의 왕”이라 단정했다.
“상토(설로부터 3대)가 맹렬하게 퍼져, 해외에서 끊어졌다(相土烈烈 海外有截)”(시경·상송)는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토는 시조 설의 손자. 중국 학계는 이 기록을 토대로 상토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으로 보고 있다. 상토는 무공이 매우 뛰어났으며, 마차를 발명하여 세력을 떨친 이다. 시조 설로부터 7~8대인 왕해(王亥)와 상갑미(上甲微) 때는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유역족은 이수이(역수·易水)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으며,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이셴(역현·易縣) 일대이다. 상족이 초기에 이미 허베이성 이셴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인쉬(은허) 인골의 비밀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인쉬(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차하이·싱룽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은 차하이·싱룽와 문화-훙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샤자뎬 하층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 대를 거치면서 발해문명의 계승자들은 남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학계는 단순히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민족과 관련이 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냥 ‘연나라의 옛 땅’이라는 군색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했듯 상나라를 이룬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 우리의 역사를 이룬 우리 민족과는 강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의미심장한 부여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다져보자. 먼저 시조설화.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탁리國) 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이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광개토대왕릉비)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은)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신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하늘이 현조(玄鳥·제비)에 명령해 상나라 조상을 낳아 넓디넓은 은땅에 살게 했다”(시경 상송 현조·詩經 商頌 玄鳥)는 기록은 상나라와 새의 깊은 관계를 웅변해준다.
고조선과 발해문명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경향신문 1월26일자 ‘고조선과 청동기’ 참조) 생략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인 부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조선과 달리 중국측 문헌자료도 풍부하기에 논란의 여지는 적어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측 문헌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위·촉·오 등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중국 후한의 정사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유송의 범엽이 5세기 무렵 저술), 그리고 당태종의 지시로 편찬된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측 사료를 종합해보자.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글귀마다 숨어있는 뜻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므로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다. 상나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은나라 역법을 쓴 이유는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지.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에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어요.”(이형구 교수)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이뿐이 아니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紂)왕은 온갖 악행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랬다면 물론 나쁜 짓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주왕은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사기 은본기)
이 대목에서 “(부여에서는)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상나라와 한민족(中)
ㆍ은·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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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
-주(紂)왕을 위한 변명-
주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과 광대를 불러놓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일”에 대해서는 다소간 할 말이 있다. 바로 음주가무야말로 상나라 풍습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는 부여 풍습이 대표적이다. 마한도 그랬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이는 왜 현재 우리나라 전국에 4만여곳의 노래방이 성업 중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무절제한 음주가무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것은 천·지·인이 만나 한바탕 신명을 떨친 축제였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만물의 소생을 기원하고 추수감사를 드리는 전통축제였던 셈이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 바로 굿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조선 시기 순장무덤인 랴오둥반도 강상무덤. |
“삼국시대 화랑도·풍류도와 고려시대 연등회·팔관회 등은 종교행사 형식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음주가무를 포함한 옛 제천의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巫)와 불교를 억압한 조선 때 크게 위축되었지만 신명과 음주가무라는 한국인의 민중문화는 면면히 이어졌다.”(조흥윤의 ‘한국문화론’ 동문선)
그렇다면 주왕의 난행은 어찌된 것인가.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이들은 의도적으로 은나라와 주왕을 무도한 나라, 그리고 천하를 난도질한 망나니로 폄훼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조작, 날조를 위해 기록한 승자의 역사인 셈이다.
일례로 축제 때 젊은 남녀들을 ‘풀어놓아’ 짝을 짓게 만드는 풍습은 지금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조사한 민족지 연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자료이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축제는 흉볼 ‘깜’도 안되는 자연스러운 풍습이다.
-동이는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
그리고 은(상)나라가 무도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탐사단이 추적해왔듯 이른바 동이족의 본향인 발해연안은 BC 6000년 전부터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은 이미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 3000년) 때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지난해 7월 말 뉴허량 유적에 선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미 이곳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의 제사유적과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봤잖아요. 하늘신, 지모신에게 제사지내고, 그리고 적석총에 마련된 제단에서 조상을 기린 그런 모습들을 그릴 수 있잖아요. 웅녀의 원형이 뉴허량 여신묘에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적석총 제단은 지금으로 따지면 조상에 대한 시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봐야 합니다.”
이교수는 “발해문명 창조자의 일파가 서쪽으로 남하해서 건국한 상나라에서는 제천(祭天),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祭祖)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도 훙산문화 시기에 벌써 신권과 왕권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본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인의 얼굴. |
그런 점에서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극악무도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유송의 범엽이 저술)과 ‘설문해자’(說文解字·후한 때 허신·許愼이 펴낸 최고의 자전)를 종합해 보자.
“동방은 이(夷)이며, 이는 근본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천성이 유순하다.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이다.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의 나라인 구이(九夷)에 거하고 싶다’(故孔子欲居九夷)고 말했다.”
‘후한서’ 동 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동이의 역사를 나열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쓴 전언(前言)에서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
“난 은나라 사람이다.”(공자의 고백)
동이가 예(禮)의 민족임을 중국사료도 인정한 것이다. 그뿐이랴. 만고의 성인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음을 고백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의 생생한 육성유언이었다.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에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공자. 하지만 그런 공자도 군자의 나라이자 불사의 나라인 동이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은나라 주왕 때 세 명의 성인이 있었다.
바로 훗날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箕子)와 송나라를 세운 미자(微子), 그리고 주왕에게 심장을 도륙당한 비간(比干) 등이다. 미자는 주왕의 서형(庶兄)이었다.
은을 멸한 주나라는 미자에게 은(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뜻을 알리고는 송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 송나라 귀족의 후손이었다. 공자는 동이족의 후예답게 어릴 때부터 타고난 듯 예법을 따랐다.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인 조두(俎豆)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
‘조두’에서 조(俎)는 제사지낼 때 편육을 진설하는 도마처럼 생긴 제기이고, 두(豆)는 대나무·청동·도자기 등으로 만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두라 하면 제기를 뜻한다. 공자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동이의 후예다웠다.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져 자신의 숭고한 뜻을 알아주지 않자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음악에 대한 공자의 철학은 심오했다.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면 그것을 가락이라 한다. 세상의 가락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우리 민족의 무용·문학·음악 등 예술의 바탕에 공자의 음악철학이 깔려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순장제도의 실상-
목 없는 순장자들의 유골. |
중국학계는 또한 은나라의 습속인 순장(殉葬)제도를 야만성과 연결짓기도 한다. 은(상)의 말기 도읍지인 안양(安陽) 인쉬(은허·殷墟)의 제1001호 대묘에서 확인된 360명의 순인(殉人)의 예를 들면서….
중국의 황잔웨(황전악·黃展岳)는 “순장과 같은 야만적인 습속은 은나라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한 것으로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3~65년 랴오둥 반도 강상(崗上)·러우상(樓上)유적에서는 100여명, 수십명을 순장한 고조선시기의 순장무덤이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사람을 죽여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이 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를 보면 “248년 왕이 죽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이를 금지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속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신라는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비로소 순장제도를 금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었을 때 무려 177명을 순장시킨 기록도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장례풍습이었다.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1만여명을 생매장했으며, 명나라 성조가 죽자 무려 3000여명의 비빈이 순장됐다.
이형구 교수는 “순장제도는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통치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동이의 습속이 야만적이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순장제도를 해석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여와 은(상)의 끈질긴 인연-
중국사서를 들춰보면 눈에 띄는 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부여’를 늘 맨처음에 올려놓고는 돋보이게 기술한다는 점이다.
진서(晋書·당태종 때 지은 진왕조의 정사)를 보면 “부여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절하고 사양의 예로 대하는데 중국과 같은 것이 있다(會同揖讓有似中國)”면서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오랑캐의 나라지만 조두(俎豆)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고~, 풍습이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大體中國如相彿也)”(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 조두는 바로 공자가 어릴 때 소꿉장난을 했던 제기가 아닌가.
물론 중국측 기록으로 따져봐도 부여가 BC 3세기쯤부터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700년이나 이어진 강력한 왕국이었기에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친연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은(상)으로부터 이어진 끈질긴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닐까. 부여, 즉 우리 민족과 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또 있으니 바로 점복신앙, 즉 갑골문화이다.
상나라와 한민족(下)
ㆍ‘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 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안양 샤오툰춘에서 나온 갑골과 갑골문자. 갑골문화는 발해문명권의 독특한 문화였다. |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쥐나의 역사왜곡공정,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클릭참조>>
<<쥐나 짱골라의 역사탐원공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클릭참조>> <<우리 땅 우리 魂 시리즈 클릭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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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개에 있어서 한자에 대한 내용 일부를 박문기님의 저작에서 인용함을 미리 밝힌다.
오늘날 우리는 "한자"를 한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한자"니 "한문"이니 하는 말은 왜놈들이 이 땅을 무단통치하면서 만들어 낸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참글"이라는 뜻에서 진서(眞書)라 일컬었고,
조선시대에 한문이라는 말이 간혹 있는 것은 한나라 선비들이 지은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결코 이 문자 자체를 한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한자에는 우리 민족의 문화가 들어 있다
예컨대 집 "가(家)"자는 집을 뜻하는 면자와 돼지 시(豕)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다시 말해 집 안에 돼지가 있다는 말인데, 이는 쥐나의 풍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즉, 오늘날에도 전라도나 제주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듯이 집안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쓰고 있는 논 "답(沓)"자가 쥐나에는 없다는 사실은 이 문자가 쥐나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논농사를 생업으로 삼은 우리 민족이 만든 것임을 증명해 준다.
(+배달민족 중에서도 부여와 고구려는 유목과 농경을 함께 하는 대표적인 반농반목국가!)
이는 한나라보다 천 수백 년 앞선 상(은)나라 때에 이미 이 문자의 원형인 갑골문(甲骨文)이 있었고
이 은나라가 바로 우리 동이족의 왕조였음을 각종 사서가 증명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상나라가 수도를 옮기면서 은나라로 이름을 바꾸어 존재했다.
졸본부여 역시 건국한 지 200년만에 고구려로 개명하여 900년간 존재했다.)
한자를 단음(單音)으로 발음하는 민족은 우리뿐이다.
글자의 소리를 보아도 한자가 우리 글임을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다.
예컨대 날숨을 뜻하는 호(呼)자와 들숨을 뜻하는 흡(吸)자를
쥐나 발음으로는 "후" "시" 하고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가 다 밖으로 나가 버리지만,
우리 식으로 "호흡"하고 발음하면 소리가 나가고 들어오는 느낌이 분명하다.
원래 자기나라의 글자라면 어느 글자나 단음으로 발음할 수 있어야 하지만,
쥐나와 왜국에서는 거의 다 복음으로 발음하고 있으며 오직 우리만이 어떤 글자든지 단음으로 발음을 할 수 있다.
(+왜국은 백제22담로의 하나로서 우리와 언어가 같았으나 백제가 무너지면서 떨어져나가 언어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음운학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이 문자가 우리 글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되는 소리를 형상화한 "합(合)"이라는 글자를 우리 발음으로 하면 입이 닫혀 하나가 되는데 반해
쥐나 발음으로 하면 "허"가 되어 오히려 입이 열려 버리며,
우리의 "출입(出入)" 발음은 소리의 나가고 들어옴이 분명한데 쥐나인들은 "츄루" 하고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가 다 밖으로 나가 버린다.
한자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배어 있다
예컨대 오를 등(登)자에 콩 두(豆)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제사상에 콩을 올렸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사상에 콩나물이 빠지지 않고 올라간다.
또한 짧을 단(短)자는 "콩[豆]은 화살[矢]로 길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짧다"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고,
장(葬)자는 사체를 풀로 묶어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며,
조(弔)자는 옛날에 한 효자가 활[弓]에 살[|]을 먹이고 부모의 시신을 지킨 데서 유래했다는 등등,
수많은 글자의 유래와 우리 민족의 삶이 연결지어진다.
고대 중원에서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곳을 "조정(朝廷)"이라 일컬은 이유와 단군조선(朝鮮)의 관계에서,
"조공(朝貢)"은 천자가 계신 조선(朝鮮)에 바치는 공물을 뜻하는 말이었으며,
사당 묘(廟)자에 조(朝)자가 들어 있는 것은 제후국의 군주가 집을 짓고 조선[朝]을 향해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했다.
결론적으로 이 "한자"라는 이름의 문자는 기실 우리 문화와 우리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쥐나문화나 쥐나말 어디에서도 이 글자가 만들어지게 된 연유를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 즉 "한자"라 이를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奴婢"라는 두 글자를 줄여서 "놉"(일꾼)이라 하고, "氏入"을 한 글자로 줄여 "씹"이라 하고,
"女焉"을 줄여 "년"이라 하고, "奴蔭"을 "놈"이라 하고, "祖至"라 적어 놓고 "좆"이라 읽는 이른바 반절법(反切法)에 대한 이야기,
동이족을 뜻하는 이(夷)자를 지금은 흔히 "오랑캐"로 훈독하지만 옛날에는 "어질다"는 뜻으로 쓰였던 이유,
그리고 우리말의 괴한(怪漢), 치한(癡漢), 악한(惡漢) 등의 말에 짱골라 한나라 사람을 뜻하는 한(漢)자가 들어 있는 이유 등에서도
많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부여와 고구려에 대해 몇 가지 부연합니다.
전국시대(서기전 453~서기전221)의 지리위치, 각 지역의 특산물 등을 기록한 『사기』「화식열전」에는 연나라의 북쪽에 부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가 틀림없습니다.
부여는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쪽 길림성 동부 연해주로 이동하여 가서 건국한 국가가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에 국호를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가 있습니다.
해부루왕의 조상이 해모수왕이니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가 가장 오래된 부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북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속해온 국가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1세기에 이미 왕호를 칭하고 하고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으니, 서기전 221년 이전의 인물인 해모수왕, 서기전 100년 전후의 인물인 동명왕과 해부루왕, 해부루왕의 아들인 금와왕은 왕으로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이므로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고,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었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까지 미쳤을 것입니다.
전한(前漢:서기전 206~서기8년)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 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즉, 옥갑(玉匣)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後漢:25~220) 때에는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가, 위(魏: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쥐나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 금ㆍ은ㆍ보화ㆍ옷감 등을 부여에 선물(상납)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겠지요.
쥐나의 조공을 받던 이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북부여ㆍ부여를 역사가 동부여의 역사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은 서기전 58년에 태어났고,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대소왕자 등 7명의 금와왕 왕자들과 주몽이 함께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금와왕은 최소한 서기전 주몽보다 20세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와왕은 서기전 78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동부여의 해부루왕이 늙도록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하느님(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와를 바위틈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부루왕은 최소한 금와왕 보다 40세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이므로 해부루왕은 최소한 서기전 118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해부루왕으로부터 북부여 땅을 빼앗아서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의 나이 또한 해부루왕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해모수왕은 서기전 221년 이전의 북부여의 왕이므로 해모수왕의 먼 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해부루왕, 동명왕, 금와왕, 대소왕자, 주몽은 해모수왕을 본적도 없을 것이고, 주몽이 동명왕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해모수왕이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 주몽의 아버지인 것 같이 조작되고, 추모왕 주몽의 시호가 왜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인 것처럼 조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동부여 출신인 추모왕 주몽의 고구려를 건국한 국시가 북부여 땅을 되찾는 “다물”이었기에 동부여 출신이면서도 북부여 출신임을 표방하였고, 북부여의 옛 땅을 차지한 부여와 통일을 이룩한 494년 이후에는 부여와 통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추모왕 고주몽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인 것처럼 조작한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인과 부여인이 본래는 한 뿌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494년 부여와 고구려의 통일로 위기위식을 느낀 백제는 자신들이 부여의 정통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동명왕이고, 부여의 위구대(태)왕이 백제를 건국한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를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명망당하는 동부여로 조작 당함으로써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면서 중국의 조공을 받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말살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경, 천진, 하북성 동부와 요녕성 서남부에 있던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 대방군, 낙랑군 등의 고토를 수복하고, 494년 부여를 통합한 고구려 영토는 천진, 북경, 하북성 북부, 요녕성 전체,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 연해주를 포함하는 대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하 동쪽의 작은 나라로 축소,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여에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가 있습니다. 기원전 220년대 이전부터 졸본부여가 존재하다가 서기전 37년에 동부여출신 주몽이 고구려로 개명하죠. 그리고 이 고구려가 남부여(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부여들을 흡수하면서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천황 등을 비롯한 한웅배달국, 복희씨, 신농씨, 공손헌원(황제헌원), 요임금, 순임금 등의 삼황오제들, 배달의 후신 단군조선, 하나라, 상(은조선)나라, 주나라, 춘추전국, 진(배달일파 흉노계), 5호16국(배달 흉노계),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 백제(남부여), 신라, 수(배달 흉노계 선비족), 당(배달 흉노계 선비족), 대진국(발해), 요(배달 훙노계 거란족), 금(배달 부여계 여진족), 원(배달 흉노계 몽골족), 후금의 청(배달 부여계 여진=만주족), 왜열도의 왜족(백제22담로 후예), 광서 장족(백제22담로 후예), 티벳 강족(배달 융족계 티벳족), 터키(배달 흉노계 돌궐족), 헝가리(배달 서흉노), 위구르(배달 흉노계 돌궐족), 묘족(배달 은나라 후예) 등 대부분이 배달의 왕조들이죠.
『신당서』 고구려전이 전하는 『고려비기(高麗秘記)』의 ‘900년 그리고『삼국유사』에 900년이라는 기록이 언급되어 있죠.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상서(尙書)』나 『일주서(逸周書)』의 기록입니다.
이미 주(周)가 상(商)을 평정하였을 당시인 기원전 12세기, 주나라와 교섭을 한 나라 가운데 고이(高夷)란 나라가 있었으며 그 주석에는 ‘옛 고구려(句麗)’라고 하였죠.
즉 고주몽 개국 훨씬 전부터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소면(蘇冕) ·최현(崔鉉) 등이 각각 40권의 《회요》를 저술한 것에 송(宋)나라의 왕부(王溥) 등이 당말(唐末)까지의 자료를 첨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당회요(唐會要)’라는 역사책에도 고구려가 900여년 존속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죠.
그렇다면 최소한 고구려는 기원전 3∼기원전 2세기에 건국된 셈입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대주류왕(또는 시조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적힌 반면, ‘삼국사기’에는 11세손으로 나옵니다. 양자를 액면 그대로 비교하면 ‘삼국사기’에는 초기 왕이 여러 명 생략됐다고 볼 수 있죠. 더욱이 ‘위서(魏書)’에는 주몽 다음에 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등 ‘삼국사기’에는 없는 왕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이에 북한학계는 고구려 초기에 5명의 왕이 더 존재했다고 보고, 각 왕의 재위기간을 40∼50년으로 상정해 기원전 277년에 건국되었다고 설정했죠.
그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사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높은가를 고려해 보기로 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언제 기록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삼국사기>는 1145년에 쓰여진 데 비해,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보다 731년이나 더 빠른 광개토대왕비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째, ‘누가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김부식은 광개토왕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으며 또 광개토왕을 본 적도 없다. 그에 비해,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몇 대 자손인가에 관한 한 김부식보다는 장수왕이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왜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김부식은 기본적으로 신라 중심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폄하하고 신라를 높이는 데에 있었다. 김부식은 고구려 성립이 신라 성립보다 20년 늦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 성립연대를 가급적 늦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부식의 말을 과연 100% 신뢰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김부식은 천년 전의 연대를 말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김부식이 주몽과 동시대의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천년 이상 뒤늦게 태어난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구려 성립 연대를 그토록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장수왕은 정치적 이유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세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비를 세우면서 자기 집안의 족보를 잘못 적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장수왕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주몽의 몇 세 손인지도 몰랐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고구려 성립연대를 신라보다 앞당겨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라는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기 때문이죠.
당시의 상황을 볼 때에 고구려 성립연대를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장수왕이 주몽과 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수를 조작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세수에 관한 김부식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의 말대로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닌 17세손이라면,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시간적 차이도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구려 성립이 BC 37년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김부식이 고구려 왕실의 세수를 잘못 적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성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남한의 식민사관학자들은 신라가 고구려,백제보다 먼저 건국되었다고 가르치니 정말 한심합니다.
최소 기원전 220년대에 건국된 국가 졸본부여(고구려)를 기원전30~40년대로 거의 200년이나 깎아먹는 짓거리나 하니....
졸본부여(고구려)를 최소한 기원전 227년대에 건국된 국가로 본다면 진시황의 진나라보다 5,6년 앞서 세워진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의 밥그릇이 진실과 민족의 부흥보다 중요하다지만 해도 너무합니다.
있는 사실도 스스로 축소시키는 미친 짓거리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남한밖에 없을 듯.
참고로 고구려, 발해의 후예 금나라, 청나라(후금)는 배달 부여계 말갈족입니다.(+고구려,발해의 백성이었던 배달계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이것 역시도 짱골라들이 고구려,발해 후예인 그들 배달계 말갈족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오히려 짱골라들이 배달계왕조들의 지배에 있었고 혹은 속국으로 살아간 노예종족입니다.
(실지로 짱골라족 자체가 허구의 개념입니다. 조작,날조를 시작하면서 허구의 종족을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클릭참조>>
사담이지만 상식의 오해를 몇 가지 풀어드리죠. 지금의 개천절이 10월3일 맞을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환>> 배달>>조선으로 옵니다. 그 중에서도 실질적인 시작은 배달부터입니다
즉 배달의 한웅시대에 우리가 시작되 고조선의 단군시대를 지나 면면히 지금까지 이어온 것입니다. 뭐 우리 한민족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것은 아실테고 그에 따라 우리는 이미 다민족국가가 된 것도 이해하실겁니다. 진짜 개천절은 음력 10월3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기로 따져서 5000년역사라 하는데 이건 맞을까요??? 정답은 역시 '아니다'입니다. 배달부터 시작되니 배달의 한웅시대 1560년간을 고려해야 하니 정확한 역사는 한기 7000년 이상입니다. 이런 오류가 벌어진 이유는 왜제35년간 왜놈들이 우리의 고서20 만종을 불태우고 왜곡 하며 자신들이 훔쳐간데 기인하죠. 뭐 문화재나 기타의 것들은 말 안 해도 알겠죠.
거기에다 하나의 팩션(사실과 픽션의 합성어)인 삼국사기와 불경의 우화등을 각색한 삼국유사만 남겨놓고 '니들은 원래 이것밖에 없었어'하고 날조한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은 그냥 조작해도 화가 나는데 우리의 정사들을 없애거나 숨기고 혹은 여러 소설들을 결합한 팩션을 만들어내는 교묘한 짓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웅과 단군을 헷갈려하며 곰족과 호랑이족의 같은 한민족들을 무슨 우화처럼 만든 것이죠. 자 그러면 한글날은 10월9일이 맞을까요??? 역시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자의 원형인 신시문자와 가림토를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은조선의 갑골문자보다 더 오래된 내몽골지역의 홍산문명(배달)에서 신시문자의 형태의 증거를 찾았다는 지나학자가 고백을 한적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해서 짱골라들이 그 유물들을 도로 숨기고 그 유적지역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하여 아무도 접근 못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누가 증거를 들이대라 하지만 과거 우리 영토를 빼앗긴 상태니 가서 보고 확인할 수도 없죠
우리가 다시 고토를 되찾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훈민정음 즉 한글을 세종대왕께서 반포하시면서 이러한 얘기를 합니다.'엣 전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 이것이 가림토죠. 뭐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상상이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외세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사서나 유적,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물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문자와 글에 대해서 유추해보면 과거 공식적인 문서나 문학작품, 여러 경서(이론,논설)는 신시문자가 쓰이고 일반 회화는 가림토를 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 자란 원래 한(韓)자이죠. 그러나 우리의 역사마저 빼앗기면서 한(漢)자가 된 겁니다. 뭐 이 (夷)가 뜻이 변해 오랑캐가 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가림토는 주로 대화위주다 보니 글을 남겨도 별로 남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모든 것들이 외세에 의해 전화되었다는게 더 정확할 것 같네요.
과거에도 사람들이 문학작품이나 경서를 다룰 때, 아무래도 가림토보다는 신시(녹도)문자가 더 잘 쓰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나 예술은 그 속에 수많은 뜻이 담겨야 각각이 감상의 폭의 여지를 넓힐 수 있거든요. 뭐 지금의 시를 보면 쉽게 느낄 수 있겠죠. 그리고 소설 역시 이런 중의적인 개념을 도입해야 복선을 깔기도 편했을 테니...... 물론 불경이나 도덕경 등의 형이상학적인 글도 마찬가지죠. 어쨌든 진정한 한글의 날은 10월9일이 아니며 세종대왕이 모두 혼자 만든 것도 아니죠. 그가 가림토를 본받아 한글창제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명령을 했을지 모르나 직접적으로 되살려낸 것은 그 아래의 학자들과 세종대왕의 공동연구에 기인합니다.
세종대왕의 훌륭한 점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옛 것을 기반으로 다시 새롭게 재창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글은 국한혼용체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한글로 다 되는데 왜 가림토는 그렇지 못 했나 하면 안 됩니다.
가림토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얼핏 못 알아듣는 순우리말의 형태에 가까우니까요.
보너스로 두개 더!!!
먼저 하나!
한민족은 고대부터 태음력과 태양력을 같이 사용했습니다
일반적인 것은 태음력을 사용하나 농사와 관련된 절기는 태양력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절기는 태양력이죠. 혹시 음력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유목,기마민족이면서도 농경민족인 한민족은 별이나 달,태양 등을 관찰할 필요성으로 고대로부터 천문학이 발달하였죠. 한민족의 수많은 지류가 있으니, 그 수많은 한민족의 갈래들 하나씩이 모여야 비로소 한민족을 이해할 수 있겠죠. 시작은 단일민족이나 세월이 흘러 수많은 갈래로 나누어지니 이미 오래전부터 한민족은 다민족국가입니다 과거 거대한 영토를 가졌을 때도 하나의 나라가 아닌 많은 제후를 거느린 연방국가였습니다. 부모와 형제는 하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다시 남남이 되어 서로 부둥켜 안고 사는 지금의 세상처럼....
그리고 천문학이 발달했다는 말은 수학에 강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 고구려의 성의 건축이 뛰 어난 것이며, 각 시대마다 훌륭한 고분이나 왕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석굴암과 같은 대단한 문화재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의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기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불가사의라 여겨질만큼 말이지요. 한글은 쉽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어렵죠. 그러나 외국어는 한국어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모든 것은 투자한 만큼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외국것이라 다 믿지 말고 우리 것이라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나 균형되고 공정하게 대하며 신중히 생각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이 혼란스러운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겠죠
참고로 몽골이나 선비 등 흉노계는 대분분 유목인족이죠. 하지만 부여나 고구려 등의 동이계는 유목과 농경을 함께 한 반농반목민족입니 다. 배달과 조선 이후로 대륙동북을 경계로 배달쥬신족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어쨌든 그들 모두는 배달쥬신족의 후예입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모여야 배달쥬신족이 됩니다. 어느 하나가 그 전체를 대변한다는 무식한 일반화의 오류는 안 했으면 합니다. 전체와 부분을 함께 고려해야 그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도 알 수 있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한 인간을 평가할 때 그의 앞면,뒷면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을 비롯한 내면 등 모든 면을 고려해야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처럼....그 사람의 얼굴만 보아서는 그가 키가 큰지 어떤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다음 둘!
사람들은 태극,팔괘,사방신이 쥐나에서 건너온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거짓이죠.
쥐나에서는 북(현무)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중앙(황제)라 하는데 이것은 날조된 것입니다.
원래 사방신은 북(현무)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중앙(곰)이다. 우리 민족의 한 상징인 곰이 빠지고 황제를 집어넣어 자기 것이라 짱골라들이 우기는데 정말 웃기는 일이죠. 하물며 공손헌원(황제헌원)마저 우리 민족인 동이인이니 말 다 한것이죠.
팔괘는 복희씨가 만들었는데 복희씨 역시 우리 민족 사람이며 조상인 것이죠.
삼태극은 배달시대부터 사용되어왔는데 삼태극 , 천지인 , 치화 교화 조화 ,삼족오 등 우리의 사상의 상징을 뜻하죠.
우리의 일반 생활에 3이란 숫자가 도처에 녹아있는 것도 마찬가지.
환>>>배달>>>조선로 이어져 오다가 조선이 무너지면서 부여,돌궐,흉노 등으로 한민족이 흩어지게 되는데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고구려에서 백제 거란(요),말갈(여진,만주족>>>금,청),대진국(발해)가 나옵니다.
서돌궐은 서쪽으로 가 지금의 터키(투르크)가 되고 흉노 중 일부는 유럽으로 가 훈족이라 불리며 아틸라의 지휘아래 헝가리의 마자르족을 이루죠, 동돌궐에서는 몽골이 나오고, 백제에서 왜가 나옵니다.
배달,조선,고구려는 삼태극(적,청,금)을 그대로 쓰고 몽골은 푸른 초원의 영향과 곰의 민족으로 자각을 가지고 금태극을 쓰게 됩니다. 백제는 적태극을 사용하고 백제의 후예인 왜국 역시 적태극을 사용해 지금의 왜국기인 중앙의 붉은 태양의 적태극 왜장기를 쓰게 된 것이죠. 고대로부터 백두산을 영산으로 여겨왔으며 청나라 역시 이를 지켜왔죠.
그래서 청나라는 백두산의 천지를 연상하는 청태극을 쓰게 됩니다. 고려는 삼태극과 양태극을 혼용해서 사용했으며
이씨조선은 양태극을 사용하였죠. 지금의 대한민국은 팔괘 중 사괘와 양태극을 사용하여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다.
태극이란 말이 쥐나에서는 송나라때 [태극도설]이란 책에서 나왔는데 우리는 신라,고려시대의 절이나 제단, 북 등 그나마 얼마 없는 자료, 유적에서 발견되니 남아 있는 것으로 따져도 이미 고대로 올라가지 않아도 태극이 원래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죠.
한웅배달국이나 곰족,호랑이족 모두 한민족을 나타내는 상징과 국가들이며, 이미 사방신이나 단군왕검조선국의 검이나 칸,선우 등에서 곰이란 말이 내포되어 있죠.
이 '곰'이란 것이 의미가 매우 중의적인데, 우리가 신성시하는 영수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임금이나 하늘신 혹은 지도자를 나타내는 '군'이 변화발음된 결과물이죠.
'군'이 '김,검,곰,금' 등으로 변음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사방신에서 보면 우리의 지도자 하늘신인 '곰'이 중앙을 차지하고 북 현무, 남 주작, 동 청룡, 서 백호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중앙의 '곰' 역시 중의적이죠. 영수인 곰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을 가리키기도 하는 한마디로 동음이의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한웅은 한신(韓神)으로, 단군 역시 단신(檀神)으로, 웅녀는 신녀(神女)로 할 수 있죠.
왜국에서는 신을 뜻하는 '곰,검' 등을 '가미'라 합니다.
참고로 그리스 로마 신화도 학자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신의 이야기를 지어서 적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민족의 지도자의 이름이나
혹은 그 민족의 이름을 신화에 대입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즉 역사로 남겼지만 그 후손 중 누가 그것을 더 위대하게 보이려고
말을 더하고 짓고 하는 중에 신화라 치부된 것이죠.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노력조차도 안 해 놓고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그리고 지금의 국사에 나오는 고구려의 지도나 설명도 그동안 과학의 발달과 함께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많은 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실제로 밝혀져서 1980년대초쯤 일부나마 찾아 개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고구려,백제의 일부의 역사만 국사에 개정되어 실렸을 뿐..
그 전체의 역사를 찾지 못 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죠.
그 영역들도 여전히 축소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쨌든 그나마 조금이라도 찾지 못했다면 짱골라의 동북,서북,서남공정에 더 쉽게 당했을 지도 모르죠.
배달겨레의 고대 피라미드군이 3군데 있죠. 하나가 만주북서부(동몽골)에 홍산문명으로, 또 하나는 배달조선왕조 중 하나인 주나라의 호경(서안,장안)에, 나머지 하나는 배달겨레 흉노계통의 강(티벳)족들이 살고 있는 티벳지역. 이 지역은 러시아 학자들이 발견했죠. 짱골라보다 과학적인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만주 북서부의 홍산문명 쪽은 독일학자들이 발견했죠.
스웨덴,독일,러시아,미국 등 여러 학자들의 유적개방요구를 했지만 짱골라들이 묵살하고, 오히려 유적에 나무를 심거나 수몰을 시키는 등 여러 방법으로 파괴하며 군사들로 통제하여 아무도 못 들어가도록 막고 있죠. 전에 만주 집안에 있는 부여,고구려 등의 피라미드나 왕묘,고분 등도 수몰(물에 수장)시켰다가 독일학회의 종용으로 수몰전의 사진 몇 장을 마지못해 독일학회에 제출했죠. 물론 어거지를 써 가며 발뺌하는 짱골라들의 만행.....치가 떨린다...... 이 유적들에 관한 것은 중앙일보와 오마이뉴스에서 다룬 기사입니다
그동안 식민사학계는 동몽골(만주 북서부 적봉시)의 조선의 전신인 배달제국(홍산배달문명)을 쉬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자강 부근의 장강문명이 배달민족의 또 다른 갈래가 이루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죠. 하기사 양심을 판 학자들을 비롯 짱골라들은 배달민족의 홍산배달문명과 장강문명의 영향을 받아 황하문명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죠.
배달민족은 배달제국 후에 쥬신을 비롯한 동쪽의 夷(동이)와 중원대륙에 퍼져 있는 나머지 여덟 夷(회이,견이 등등)으로 나누어지고, 북쪽 역시 배달민족 갈래 흉노가 나옵니다. 이 흉노가 후에 강(티벳)족,선비,오환,거란,몽골,돌궐 등으로 나누어지죠.
태호복희,신농염제,공손헌원,요순임금 등 삼황오제는 모두 배달민족들이죠. 조선, 하, 은, 주, 춘추전국 모두 배달의 왕조들입니다. 공자,묵자,항우,맹자 등도 배달의 후예죠. 이것은 청나라 역사서 [사고전서]뿐만 아니라 대륙의 많은 배달갈래왕조들 각각의 역사서 25사 곳곳에 나와 있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갈래 흉노계통이죠. 우리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단국대 윤내현교수나 서울대 신용화,박성범 교수 중앙대 김종서 교수 연변대 심백강 교수 고려대 박원길 교수 명지대 임승국 교수 등의 설도 참고했으면 하네요
재야사학자라고 몰아부치며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는 식민사관학자들의 억지는 6,70 년대까지나 통하던 일이죠. 그러면 저 위의 여러 강단사학자(대학교수)들마저 재야학자라고 몰아부치며 일반인들을 오도할 것인지...계속해서 진실된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강단사학자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옛고토를 회복하지도 못 하고 오히려 이렇게 반도분단국가로 된 지금,파괴되고 있는 우리 유적들을 보호하거나 조사할 수도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쥐나가 숨기고 있는 우리의 여러 사서나 자료들과 왜왕실에 아직도 잠들고 있는 여러 문화재를 비롯 사서 등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알 수가 어렵다는 사실이 슬플 뿐입니다. 그 사서 등을 포함한 여러 자료들을 입수할 수만 있더라도 좋을텐데...아무리 밥그릇이 진실보다 중요하다지만, 자국의 역사를 축소하고 진실을 오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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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송영선, 안명옥 등 딴나라당 의원들. 대한민국 서울에서 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 참석.
짱골라학자 낙빈기 금석문에도 저것에 대해 어느 정도 발혀져 있고, 하나라와 은나라가 모두 동이족 국가이며 은나라의 갑골문은 유명하죠. 그리고 은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 역시 동이족 국가죠.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나라가 배달 9夷의 후손이란 것도..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 하가점문화나 장강문화 등 모두 배달민족들이 이룬 것이 라는 고고학적 사실이나 논문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고 KBS역사스페셜,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도 다룬 내용이죠.
독일, 핀란드 등을 비롯한 유럽, 미국, 러시아 기타 등등 셰계 여러 학자들이 짱골라의 방해로 유적조사 방문이 막혀 진행이 지체되고 있는 것도 사실...
민족에 관한 내용은 요사, 금사, 원사, 청사 등에 보면 그들이 모두 고구려나 흉노 등 배달계통 동이의 후예 또는 갈래민족이란 것을 다 밝히고 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 청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예라고까지 자처했으며, 특히 신라가 망한 후 그 신라 왕족 일부가 이들 나라들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것도 얘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수많은 북방민족왕조들하에서 짱골라 한족은 똥개와 동급인 최하층계급이었죠.
원나라 치하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 몽골인이었고 다음이 고려인, 승려들인 라마를 비롯한 티벳인, 이슬람인이었죠.
짱골라는 아예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노예계급이었죠.
또 청나라 조정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 #34201;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들의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 #34201;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 #37992;)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실제 짱골라들이 자랑하는 한족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왕조들은 홍산문명 한웅배달국이나 요하문명 단군조선국의 제후 또는 갈래왕조들입니다.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이 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 등 여러 고고학 유적지가 밝히짐에 따라 실재성이 드러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짱골라들이 지들 조상이라 억지 부리는 복희, 신농,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마저도 모두 배달민족들이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계통 흉노족국가죠. 그러니 짱골라들이 역사공정하려고 발악할 수 밖에...그리고 박창규님의 글도 인용해보겠습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에 불교를 전할 뜻을 세우고 히말라야를 넘어 동쪽으로 갔다. 이처럼 뜻을 세운 사람 하나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있는데 거대한 종족의 무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역사를 찾는 후세의 노력부족에서 원인을 찾아야하는 문제겠지만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사례 하나를 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비약시켜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것이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의 투쟁으로 곰족이 승리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은 역사가들도 지지하는 설이다. 곰족이 우리가 말하는 단군조선의 정통구성원이었다면, 호랑이족은 누구였으며 정통성 다툼에 패배한 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단군신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 역사와 연결시켜보자.
단군왕검의 출현은 환웅 신시배달국의 분열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환웅이 아들을 보고 아들이 왕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왕조와 왕조의 교체를 너무나 함축적으로 설명한 신화다.
창세기 1장1절과 2절 사이의 간격만큼 먼, 그런 거리를 단 한 사건으로 연결한다. 신화의 용도는 그런 것이다. 천년의 비약이 환웅과 웅녀의 가족사에 숨어있는 셈이다. 이 연결고리에 곰과 호랑이의 설화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원래 함께 살았던 곰과 호랑이가 단군을 기점으로 헤어진다는 의미다. 그것도 마늘과 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곰은 환웅의 적통을 이어받을 옥동자 단군을 낳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의 흔적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호랑이족이 정통성에 패배해 권력을 잃고 피지배층이 되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멀리멀리 다른 땅을 찾아 떠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면 호랑이 토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 있고 산동성에서 청나라 때 발견되어 다시 세워진 고대 사당에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판박이한 듯한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는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적통을 잇는다.
호랑이라는 점만 빼면 단군신화와 이야기 줄거리가 같은 벽화가 걸린 이 사당의 이름을 '무씨사당'이라고 한다. 나는 호랑이족의 출현을 중국왕조의 출현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때만 해도 중국적 특징보다는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더 많은 고대중국의 국가다. 실제로 초대 단군시대는 중국의 요임금과 맞물려있고, 한단고기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요임금은 한웅시대에 배달국에 도전했던 황제(黃帝)헌원 이후 최초로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나라을 세운 중국왕이다. 한단고기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요임금이 중국의 동북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동쪽 바다로 놀러갔다가 용에게 겁탈당해 요임금을 낳는다. 특히 요임금이 천거하여 왕이 된 순임금의 아버지는 고수라는 사람으로 중국이 아닌 동쪽 나라의 관리였다. 한단고기의 연대기를 믿기만 한다면 순임금이 고조선 관리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증거할 수 있다
이 때만해도 중국과 조선이 민족국가로 분리된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중국보다는 우리종족에게 더 가깝다는 의미다.(그러나 일단 국수주의적인 해석은 삼가자)
요순 뒤를 잇는 하나라와 은나라에 와서 드디어 우리는 호랑이의 정체를 본다. 환웅의 배달국에서 함께 살았던 곰과 범은 아마도 누가 진정한 계승권자냐라는 적통의 문제로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는 그 사실을 매우 상징적이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범은 못 참아 떠나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적통을 이었다는 거다.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곰족과 갈라선 범족은 이미 환웅시절부터 광범위하게 대륙에 흩어져있던 夷족(배달족)을 결합하여 곰족의 조선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 첫 나라가 상(은)나라다. 그들이 배달범족이다. 상상을 돕기 위해 이렇게 정리해보자.
한웅의 신시배달국 시절에 많은 종족들이 연합을 이루어 살았다. 물론 그 중 적통은 고조선으로 나라를 이어간 곰족들이지만 다른 많은 종족들(말갈, 선비 등등)과는 형제국이었을 것이다.
적통을 잇는 과정에서 범족이 분리되자 그들은 곰족과 대립하게 되었고 다른 형제국들과는 달리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중국족, 즉 화하족과 혼혈문화를 이룬다. 중국문화 자체가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상당부분 기마종족의 특징을 지키며 나라를 이어 간다. 이 배달범족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고유성을 지켰을까? 지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진흙탕에 묻혀 고유함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한 사료를 근거로 이 흔적을 한나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우선 주나라에 패퇴한 기자가 동북으로 가서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의 왕이 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연대기로 보면 진시왕 시절에 해모수가 부여를 세우고 조선을 폐했으므로, 한나라에 망했다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이 번조선이다.) 성삼문이 읊었다는 백이숙제의 수양산 이야기도 이 시절의 것이다. 하는 짓으로 보아 틀림없이 배달족이다...이야기를 이어보면, 상(은)나라가 망한후 주나라가 섰지만 많은 수의 배달범족이 여전히 중국땅에 살았다. 그래서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고 이 때문에 옛조선의 동이족은 더욱 이들을 동족취급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알고있는 “사기열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 갈래인 배달범족의 나라다. 공자가 인자의 나라인 동쪽 나라로 가고싶다고 한것은 바로 그들의 원래 출신인 배달 나라로 가고싶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모략과 후안무치가 난무한 중원에 비해 동방 고조선의 태평성대는 거의 환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타락한 지금에 와서, 태평성대의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오히려 모사와 정쟁으로 점철된 사기열전은 잘 팔릴지언정 교화와 훈시로 가득한 옛조선의 기록은 정말 재미가 없다. 사기열전에 나오는 춘추시대의 나라들 중 거의 대부분이 배달범족의 나라였다. 이런 기록은 그들이 조선과 적절히 연합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면서 나라를 운영했다는 사소한 기록을 죄다 훑어봐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다. 중원대륙내의 배달범족 국가들은 혼혈문화로 뒤덮이기 시작했던 초대 단군시절부터 조금씩 배달겨레의 순수성, 즉 기마종족적인 요소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상(은)나라는 틀림없이 기마종족적 요소가 강한 북방민족의 후예였고, 주나라 동북을 차지한 연나라는 그 국민들 대다수가 화하족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아우가 풍속을 바꾸는데 삼년이 걸렸다고 고백한 틀림없는 배달범족 국가이고 송(宋)나라와 위(衛)나라도 배달범족국가라는 증거가 많은 나라들이다
배달범족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 한웅배달국 시절에 중국에 터를 잡은 배달국가, 즉 동이(東夷)가 아닌 다른 夷족 국가로는 제나라와 래나라, 오월동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다.
특히 패왕항우로 유명한 초나라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을 구성하는 종족들은 주로 蠻夷(만이), 淮夷(회이), 萊夷(래이) 등의 초기 배달족이다.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에 있었던 아홉가지 夷족(九夷)의 후손들인 셈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문헌으로의 역사란 쥐나족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책에 의지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쓰기 시작한 책에서 시작하는 역사라...
사기열전은 이미 한나라라는 화하족의 나라가 선 다음에 나온 책인데, 여기 보면 진시황은 중국땅에서 배달족의 영향을 몰아내기 위해 장성을 세우고 옛기록을 태우고 유(儒)라고 부르는 지식인들을 매장한다.
儒, 지금은 공자학파로 부르지만 그 때만 해도 공자를 비롯해 제자백가를 모두 유라고 불렀다.
이를 제사장적인 전통을 가진 기마민족의 지식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주 무왕이 기자에게서 배운 사례 등)
단군왕검이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곰족의 것이라면 儒라는 지식인적 전통은 배달 범족의 것이었던 셈이다. 진시황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배달족의 나라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하고 전국을 맞는다. 유방과 항우의 혈전으로 삼천만에 달했던 중원의 인구는 육백만으로 줄어들었다. 배달범족은 이때 씨가 말라버린 셈이다. 이 때부터 허구의 종족 '쥐나 짱골라'가 섰다. 漢나라다. 그 한나라가 사기열전을 썼다!
제 종족 이외의 종족을 죄다 제거하고 그 땅에 있는 옛 것을 죄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역사전환의 출발점"이다...호랑이들은 서쪽으로 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진시왕 때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한나라와 중원을 놓고 일전을 벌인 초(楚)나라는 만이(蠻夷)땅에 살던 웅역이라는 사람의 조상에서 비롯된다고 사기열전에 적혀있다. 근원을 잘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사마천의 의도를 잘 아는 나는 패왕 항우가 배달범족의 마지막 왕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말? 정말!
장기둘 때 생각나겠네? 응!
언제나 초나라를 아래로 취급하는 것, 바꾸면 안되나? 바꾸자!
<<'무씨사당 화상석'과 '배달겨레' 클릭참조>>
콩의 원산지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듯 합니다.
콩의 원산지는 만주입니다. 지금이야 그 땅을 빼앗겨 있는 상태이지만 고대부터 우리의 터전이었던 곳이죠.
콩에 대해 네이버 백과사전을 인용합니다.
(+현재 우리의 잃어버린 고토 만주를 중국의 만주라 표기되어 있어,
마치 처음부터 짱골라의 것인 것처럼 착각할까 싶어 바르게 용어정리 했습니다.)
콩은 야생의 들콩(덩굴콩)으로부터 재배작물로 발달하였다.
동북아시아(만주) 지방에서 야생콩과 콩의 중간형이 재배되고 이들의 변이형(變異型)의 분포로 볼 때,
콩의 원산지는 수천년동안 배달민족이 활동한 만주,연해주,몽골 등의 동북 지방에서 중원북부에 걸친 지역으로 추정된다.
중원에서는 오곡의 하나로 4,000년 전부터 재배되었다.
한국 음식은 거의 모두 간장·된장·고추장 등 장류로 간을 맞추고 맛을 내므로, 장의 맛은 곧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기본 요인이 된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된장을 먹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지만
(+외세의 침략에 의해 모든 것이 소실되었다는게 더욱 정확),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에서 장양(藏釀)을 잘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된장·간장이 한데 섞인 걸쭉한 것을 담가 먹다가 삼국시대에 와서 간장·된장을 분리하는 기술이 발달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장양이란 술빚기·장담그기 등 발효성 가공식품을 총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 춘장 같은 쥐나식 장양식품 등의 재료와 요리들은 배달계통왕조들이 퍼뜨린 것이 대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짱골라왕조의 한, 송, 명 3왕조를 제외한, 수많은 배달겨레왕조들 시대의 발견, 발명, 업적은 당연히 그 주인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허구의 종족이 실재의 종족인 우리 수많은 배달겨레 형제들의 공동유산을 빼앗아가길 원하지는 않겠죠.
거짓이 오히려 득세하여 진실을 묻어버리는 기막힌 현대 모순 속에, 우리 배달형제들의 유산들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 조상들까지 짱골라로 둔갑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
<<국물 문화의 주인공 '장' 클릭참조>>
다음은 네이버에서 고추에 대해 좀 더 찾아봤습니다. 그 내용 일부를 인용,참조합니다.
일례로 왜국의 한 사이트인 이 곳 http://goo.ne.jp 에 들어가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고추 - 나스과의 일년초. 근세 초기에 도래. 높이60센티미터 내외. 여름에 백색의 꽃을 연다.
매운 맛이 강한 타카노트메 등은 고려후추(高麗胡椒) 라고도 불린다.
굵은 글씨체로 표현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추는 왜국에 근세 초기에 전해짐. 고려후추(高麗胡椒)라고도 불린다./
이 부분이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왜국의 근세는 보통 에도시대(1603~1867)부터 였다고 하니
고추가 임진왜란때 왜국에 있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이름까지 " 고려 후추 "라고도 부른다고 하는 글도 보입니다.
{주: 위 사이트에서 고려후추(高麗胡椒) 를 검색하면 (한문으로 검색) 자료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려진 고추가 임진왜란때 왜국에서 들어왔다는 '설'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추'는 '고려 후추'의 준말이 아닐까요.
후추(胡椒)는 호(胡)지역의 초(椒)라는 것인데 (원래는 후추가 아니라 호초)
호(胡)지역은 만주입니다.
즉 고구려 지역입니다.
고구려의 정식 나라이름은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입니다.
'고구려'는 공식 명칭이 아니라 별칭입니다.
쥐나 여러 사서 등의 책에도 고구려는 보통 '고려'로 나옵니다.
발해도 정식 나라이름이 '고려'입니다.
발해의 대왕들은 자신들을 '고려국왕 대흠무', '고려국왕 대무예'로 불렀습니다.
즉 발해는 자신들이 고구려(고려)의 부활이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고구려(고려)라 한 것입니다.
'근세고려 태조 왕건'도 고구려의 부활을 뜻하면서 나라이름을 고구려와 같은 고려로 정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 후손이고 많은 고구려 후손들의 지지로 고려를 세웠습니다.
제1 고려 = 졸본부여(고구려)
제2 고려 = 대진국(발해)
제3 고려 = 근세고려
그런데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고추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나옵니다.
고추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오래전부터 재배하였다.
열대에서 온대에 걸쳐 널리 재배하는데,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국에는 담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한국인의 식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내력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사람을 독한 고추로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이로 인하여 오히려 한민족이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왜국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왜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이재위(李裁威)는 《몽유(蒙纜)》(1850년대)에 북호(北胡)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였다.
민간에서는 장을 담근 뒤 독 속에 붉은 고추를 집어넣거나 아들을 낳으면 왼새끼 줄에 붉은 고추와 숯을 걸어 악귀를 쫓았다.
참고로 북호(北胡)는 시베리아(몽골 지역 포함)입니다.
한국인의 주류(70 ~80 %)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부근 추정) 에서 살던 분들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고추의 원산지가 남미라는 것은 유럽인들이 남미에 갔을 때, 이미 남미에서 고추를 길러 먹고 있었기 때문에 원산지가 남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메리카 (북미,중미,남미) 인디언은 시베리아-만주에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일례로 스탠포드대학 조세 그린버그 교수, 애리조나대학 스티븐 제구라 교수, 애리조나주립대학 크리스티 터너 교수팀의 연구 결과는
첫 번째는 1만 4천년 전에 시베리아에서 이주,
둘째는 6천년 전에 역시 시베리아에서 이주,
셋째는 4천년 전에 만주 아무르강 유역에서 이주.
물론 세계 고고학계에서 1만 4천년 이전에도 건너갔다고 보는데 그때는 원시 석기시대인이었고
말하자면 문명다운 문명(정신 물질)을 가지고 간 사람들은 1만 4천년 전에 건너갔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고추씨를 가지고 가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이래저래 고추는 원래 시베리아-만주에서 길러 먹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보입니다.
다음은 순창에 전해지는 고추 관련 전설입니다.
고려말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기거하고 있던 순창군 만일사를 찾아가던 도중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 맛을 잊지 못하다가
조선을 창건 등극한 후 진상케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는 전통고추장에 암 예방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학계에서 잇따라 발표되고 있어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내력에 대해서는 임진왜란때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왜국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임진왜란때 한국에서 왜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출처 : 정읍군 사이트)
순창 고추 전설에서도 한국에는 고추장이 근세고려말 즉 이미 임진왜란 훨씬 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제 때 거꾸로 고추가 왜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고 조작되었다고 보여짐.)
왜국에서 '고추'를 '고려후추'라 한다면
한국이나 쥐나, 왜국에서 기록된 옛 책의 '후추'는 '고추'를 말하는 것도 있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후추'의 한 종류로 '고려후추'가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여러가지로 보아 고추는 왜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한국에서 왜국으로 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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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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