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명육통이란 무엇인가 / 청 화 스 님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제가 삼명육통이란 말을 자주 하는 편인데,
더러는 '삼명육통은 외도꾼들이 하는 것인데...' 하며 뒤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신통을 하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는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공부가 되면 저절로 신통이 나온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무시할 것입니까?
실제로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을 했고, 지금 종교인들이 불신받는 세상에 삼명육통을 하는 도인이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문화가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냅니다만, 우리 불성은 그런 류가 아닌 것입니다.
컴퓨터는 인간이 입력을 시켜야 나오지만 그보다 훨씬 더 무한한 성능이 우리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성을 계발하면 그런 컴퓨터는 문제도 안 됩니다. 그 무한능력 중 하나가 삼명육통입니다. 삼명(三明; 숙명통ㆍ천안통ㆍ누진통)은 무엇인가?
우선 과거의 통달무애라, 과거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더러 점쟁이한테 점을 쳐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구경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귀신들도 과거를 조금은 봅니다. 더러는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지요. 사람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래의 영명함이 많이 가려집니다. 살면서 세속적인 여러 가지를 배우다 보면 분별시비가 잔뜩 쌓여서 영명한 본래생명이 흐려집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더러는 이상하리만큼 영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천재적인 꼬마들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분별시비와 삼독심(三毒心)을 다 떠난 도인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우리 마음을 가장 중독시키는 것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이 삼독심 아닙니까? 그것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도 오염시키고 남도 독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병이 전생부터 묻어온 업병도 있지만, 금생에는 이 삼독심 때문에 우리 몸과 마음이 중독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삼독심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설사 독을 마신다고 해도 그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를 죽이려고 광통법사 같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독을 드려도 그 독이 몸에 받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달마대사께서 인연이 다한 고로 스스로 가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청정한 사람들은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심으로 오염되어 우리 내장이 청정하지 못한 고로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가 그만큼 오염돼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주의하고 육식과 과식을 피한다면 그만큼 침해를 덜 받습니다. 그것은 생리학자나 병리학자들이 다 증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삼명, 이것은 과거에 막힘이 없고, 미래에도 막힘이 없으며, 또 우주를 모두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가리킬 때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합니다.
그 말은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우주의 모두를 다 안다는 말입니다. 그냥 본질적인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가령《정감록》의 비기(秘記)들을 보십시오. 물론 비기에도 틀리는 것이 있지만 더러는 아주 신통하게 맞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계발하면 할수록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내다보고 미래를 보고 우주를 본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한테 본래 있습니다. 《정감록》에만 있고 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다 있는 것인데 우리가 계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발하는 작업이 바로 참선이고 그 참선법이 가장 훌륭하고 지름길로 가는 방법입니다. 참선이야말로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무한공덕을 길러내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행동을 주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마음을 항시 본체인 부처님한테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과 얘기를 하거나 책을 볼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상 그곳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차근차근 그것에 접근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동시에 자기 번뇌를 완전히 녹여버립니다. 불교말로 하면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이라, 과거에 통달무애하는 것이 숙명통이고, 미래에 통달무애하고 우주를 모두 내다보는 것이 천안통입니다. 누진통은 번뇌를 다 떼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다 떼어버리면 성인이 되겠지요. 과거에는 미개한 때라서 특수한 사람들만 성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직관적으로 성인이 나올 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굉장히 영리하니까, 사상적으로도 그 많은 전쟁과 반목을 통해 많은 경험을 다 했지 않습니까? 그런 전쟁과 반목은 다 성자의 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고 사람으로 인한 인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가 교환되면 될수록 성자의 길은 더욱더 빛날 것입니다. 그 길밖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 다음은 육통(六通; 六神通이라고도 하며, 천안통ㆍ천이통ㆍ타심통ㆍ숙명통ㆍ신여의통ㆍ누진통)이라,
이 육신통은 위에서 언급한 삼통에 다같이 거두어져 있습니다.
천안통은 우주를 다 내다보는 것이고, 천이통(天耳通)은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재주가 없어서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 하는 사람들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마는, 만약 천이통을 했다면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듣는 것입니다.
천이통이란 그와 같이 개가 짖으면 축생의 말도 알아듣는 것입니다. 타심통(他心通)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타심통을 다는 못해도 척 보면 대강 그 사람을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도 있으니 함부로 지적은 하지 않습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지혜고, 다섯번째는 신여의통(身如意通), 즉 신족통(神足通)이라, 이것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통법을 받은 분이 마하가섭존자이고, 그 다음 분이 아난존자인데 아난존자가 열반 드실 때의 그 열반상은 우리에게 굉장한 신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은 신통을 여실하게 증명했습니다. 부처님의 금관을 역사(力士)들이 횃불로 불을 붙였지만 붙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름을 부어도 안 붙으니까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직접 자기 몸에 불을 내어 스스로 금관을 태우고 몸을 태워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불성 가운데는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즉 우리 불성을 가리켜서 마니보주(摩尼寶珠)라, 여의주(如意珠)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보물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대한 마음을 두고서도 모르니까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금을 가지고서 얻어먹는 거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값진 보배를 가지고도 가진 줄을 모르고 하찮은 일에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금을 잔뜩 곳집에 넣어 놓고 거지행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무한공덕장인 우리 마음을 캐내는 작업을 하면서 사업도 하고 사회 일도 하면 훨씬 잘될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물과 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만 생각하면 불이 되고, 물만 생각하면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명육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고 하느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지 못할 뿐입니다. 《아함경》에 전하는 부처님 말씀 중에 "영생불멸하는 그 길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중생이 가고 안 가고 하느니라."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중생이 게을러서 가고 안 가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불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무한한 성능이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짐작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누진통,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마저 다 떼어버리는 그런 신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탈(解脫)이라, 우리는 한사코 해탈을 해야 됩니다.
해탈을 해야만이 우리 삶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삶의 보람은 우리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가짜입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천재지변으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박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과업인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구속을 다 끊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속을 받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얼마나 구속을 많이 받았습니까?
또 김일성주의 때문에 우리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처절한 속박 속에서 고생을 합니까? 불교는 그런 구속을 다 푸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구속, 제도적인 구속을 다 풀어서 성불하기 좋은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제일 좋은 제도가 바로 승가의 법인데, 진정한 승가의 법은 감투나 놓고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라,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치로 해서 먼저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선지식들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기본적인 길을 알고 가야 합니다. 불교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지혜해탈은 이론적으로 막히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보통 이론적인 체계만 서면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지혜해탈에도 미처 못 간 것이니, 참다운 해탈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해탈은 선정이라, 참선을 해서 우리 생리와 심리가 아울러 맑아지고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우리 몸뚱이 역시 정화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공자가 칠십이 되어서 말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이런 정도가 되어야 선정해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 행동을 도덕적으로 훈련시켜야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 우주의 근본진리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생각하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느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불교문학 장명등 http://cafe.daum.net/ad48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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